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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 연주 봉사하는 바이올리니스트 박지혜

910 2016.09.18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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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14세에 獨음대 입학…세계 놀래킨 바이올린 신동

ㆍ슬럼프와 함께 찾아온 우울증, 봉사로 이겨내

ㆍ“상처받은 영혼 치유하는 ‘희망의 연주’ 하고 싶어요” 

 


1985년 독일 마인츠에서 출생했다. 독일 총연방 청소년 음악콩쿠르 2002~2003년 2회 연속 1등으로 바이올린 영재가 됐다. 2003년 독일 정부 예술부 장학기관으로부터 세계 3대 명기 중 하나인 1735년산 ‘페투루스 과르네리’를 무상 지원받아 8년째인 현재까지 연주 중이다. 이 악기는 가격을 매길 수 없다. 다만 비슷한 류의 악기가 경매에서 100만달러에 거래된 적이 있다. 우리 돈으로 10억원이 넘는다. 그렇다면 독일인? 아니다. 엄연한 한국 국적의 바이올린 연주자 박지혜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무대는 화려하지 않다. 박지혜씨가 낮은 곳에 임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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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악기가 세계 3대 명기인 ‘과르네리’다. 이 악기 전면부에는 박지혜씨의 피나는 연습으로 인한 수많은 손톱 자국이 잔상으로 남아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박물관에 있어야 할 악기가 살아서 음악을 노래하고 있는 셈. 우리와 다른 그들의 예술 사랑이 경외감마저 들게 한다. (사진 김문석 기자​-스포츠경향)



“내 인생은 매일매일 개봉박두예요. 5년 후쯤에는 정통 바이올린 연주자로 최고의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네요.”

 

 

26세의 바이올린 연주자 박지혜씨의 목소리가 옥구슬 굴러가듯 경쾌하다. 공연 후 이어진 인터뷰에 지친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콘서트가 그녀에게 힘을 된 듯하다.

 

언뜻 보면 그녀의 무대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박지혜씨는 시간을 쪼개 적지 않은 시간을 낮은 무대에서 콘서트 문턱을 넘어 본 적 없는 사람들 앞에 선다. 관객의 드레스코드는 병원마크가 선명한 환자복이 대부분이다. 무대는 병원 로비다. 병마와 오랜 싸움에 웃음을 잃은 사람도 적지 않다. 지난 14일과 18일에도 동아제약과 세브란스병원의 후원으로 병원 콘서트를 열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지만, 그녀의 관객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마땅한 음악 문외한이다. 엇박자와 같은 콘서트에서 물과 기름 같던 양측은 얼굴 가득 웃음을 가득히 물고 박수와 인사를 나눈다. 인터뷰에서도 웃음을 가득 피워놓고 있는 박지혜씨처럼, 그녀와 그날 무대를 함께한 관객 역시 즐거운 추억을 하나 얻은 셈이다.

 

박지혜씨가 이렇게 고단한 무대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녀에게 찾아왔던 ‘우울증’의 아픔 때문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어린 지혜가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다시 독일에 간 것은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시기인 12살 말엽이었다. 많은 음악 전문가들 앞에서의 오디션은 ‘극찬’ 일색이었고, 독일 마인츠 음대는 16세부터 입학할 수 있다는 교칙을 바꿔 14살 때 지혜를 최연소 입학생으로 받아들인다. 이어 국제대회 입상률이 높은 카를스루에 국립음악대학교로 옮긴 그녀는 최고 점수로 졸업하면서 또다시 화제가 됐다. 이후 미국에서도 음악 공부를 하며 수많은 콩쿠르에서 월등한 실력으로 우승 이력을 쌓아갔다.

 

 

독일 정부로부터 세계 3대 명바이올린 중 하나인 ‘과르네리’를 지원받아 아직까지 연주하는 영예를 안았고, 2007년엔 독일 라인란드팔츠주의 ‘미래를 이끌어갈 음악인’에 뽑혔고, 2009년 제41회 대한민국 대통령 국가 조찬예배 독주 등에 초청됐다. 그러나 어린 지혜에게 주위의 찬사와 기대는 부담이 됐다.

 

“13~14살 때 우리나라가 IMF구제금융을 받게 되면서 유학 생활이 어려움에 처했어요. 모든 것이 2배가 됐죠. 연습은 게을리 할 수 없어서 밤중엔 학교 음악실에서 연습을 했는데, 경비 아저씨가 문을 걸고 퇴근할 때도 많았어요. 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를 지르면, 남의 사정도 모르고 길 건너 집에서 시끄럽다고 화를 내는 때도 많았죠.”

 

 

어린 지혜에게도 IMF 구제금융체제는 가혹했던 모양이다. 박지혜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너무 목이 탔어요. 아침에 물을 한가득 담아와도 언제나 모자랐어요. 물값이 너무 비싸 사먹을 수 없었거든요”라고 말할 때는 눈에 수심이 가득했다. 주변 환경과 심적 부담이 그녀에게 ‘우울증’의 화를 키웠다. 2005년 드디어 도진 병은 이후 3년간 그녀를 괴롭혔다.

 

“모든 게 귀찮았어요. 법을 먹는 것도, 방 안에 햇빛이 들어오는 것도 싫더라고요. 마인츠 음대에 다니면서 일반 인문계고 과정을 함께 이수했는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음악을 계속해야 할지를 몰라 방황했던 시기다. 그렇게 암울한 터널 속에서 만난 것이 몸과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었고, 그들 앞에서의 연주가 그들은 물론 그녀에게도 치유의 희망을 안겨줬다. 우울증이 심각해져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많은 봉사 연주를 통해 또다시 무대에 설 힘을 얻게 됐다. 음악 봉사를 위해 소록도를 찾기도 했다는 박지혜씨는 “환자들에게 어려울 것 같았던 클래식 곡을 쉽게 편곡해 연주하면서 내 연주가 사람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고 나 역시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천형 앞에서도 꿋꿋이 소록도의 삶을 이어가는 나병 환자에게서 희망을 본 셈이다. 박지혜씨의 연주에 환자들은 안식을 찾았고, 그녀는 안정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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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스토리는 SBS <스타킹>을 통해 감동의 사연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2011 상반기 특집에 바이올린 하나로 대한민국 우울증을 사라지게 했던 박지혜씨는 당시 트로트 ‘무조건’을 연주하며 등장해 흥겹게 춤을 추며 관객을 압도했다. 그녀의 연주회를 후원한 동아제약 최호진 부장은 “바이올리니스트 박지혜는 극심한 슬럼프와 함께 찾아온 우울증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으로서 그녀는 희망을 잃었을 때의 괴로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며 “그녀는 환자들과 함께하는 음악회에 남다른 애착을 갖는다”고 전했다.

 

 

(이하 하략)

 

 

 

 

출처: 스포츠경향 강석봉 기자 (2011년 07월 18일)

원본링크:  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art_id=201107182137173&sec_id=5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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